그가 결혼한 날, 나는 떠났다

GoodNovel 완결

7년을 사귄 남자친구는 나와 혼인신고를 하기로 한 약속을 99번이나 취소했다. 처음에는 새로 뽑은 여비서가 사무실에 갇혔다며 급히 회사로 돌아갔다. 나는 혼인신고를 하러 간 구청 앞에서 새벽까지 기다려야 했다. 다섯 번째에는 함께 신고서를 작성하던 중, 여비서가 거래처 고객에게 괴롭힘을 당한다는 연락을 받고 달려갔다. 남겨진 나는 사람들의 비웃음거리가 됐다. 그 후로 우리가 어느 날 혼인신고를 하기로 하든, 여비서에게는 어김없이 그의 도움이 필요한 일이 생겼다. 결국 마음을 완전히 접은 나는 떠나기로 했다. 내가 남안시를 떠난 뒤, 송재원은 무려 5년 동안 미친 사람처럼 나를 찾아다녔다.

챕터 (1)

1화

7년을 사귄 남자친구는 나와 혼인신고를 하기로 한 약속을 99번이나 취소했다. 처음에는 새로 뽑은 여비서가 사무실에 갇혔다며 급히 회사로 돌아갔다. 나는 혼인신고를 하러 간 구청 앞에서 새벽까지 기다려야 했다. 다섯 번째에는 함께 신고서를 작성하던 중, 여비서가 거래처 고객에게 괴롭힘을 당한다는 연락을 받고 달려갔다. 남겨진 나는 사람들의 비웃음거리가 됐다. 그 후로 우리가 어느 날 혼인신고를 하기로 하든, 여비서에게는 어김없이 그의 도움이 필요한 일이 생겼다. 결국 마음을 완전히 접은 나는 떠나기로 했다. 내가 남안시를 떠난 뒤, 송재원은 무려 5년 동안 미친 사람처럼 나를 찾아다녔다. 제1화 송재원과 혼인신고를 하기로 한 약속이 벌써 99번째였다. 이번에도 나는 곱게 다려 놓은 원피스를 입고, 뜨거운 햇볕 아래 약속한 시간에 맞춰 혼인신고 접수처 앞에서 송재원을 기다렸다. 이제는 직원들도 내 얼굴을 알아볼 지경이었다. 한 직원이 나를 보더니 긴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이 벌써 99번째죠? 남자친구분은 대체 오시기는 하는 거예요?” “이렇게 여러 번 오시는 동안 처음 같이 왔던 부부는 벌써 이혼까지 했는데, 아직도 혼인신고를 못 하셨네요!” 내가 하도 자주 오다 보니 직원들은 언제쯤 혼인신고에 성공할지 내기까지 했다고 한다. 그런데 내 성공에 돈을 건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때 멀리서 송재원의 BMW가 천천히 다가왔다. 눈이 번쩍 뜨인 나는 허리를 곧게 펴고 성큼성큼 차를 향해 걸어갔다. 하지만 가까이 가기도 전에, 뒷좌석에서 커플룩을 입은 두 사람이 내리는 모습이 보였다. 송재원은 비서 고은서의 손을 잡고 구청으로 들어가려 했다. 나는 잠시 멍하니 서 있다가 두 사람을 가로막았다. “이게 무슨 짓이야?” 송재원은 그제야 나를 발견했다는 듯 고개를 들었다. “아, 오늘 너랑 혼인신고 하기로 한 걸 깜빡했네.” “미안해. 은서가 집에서 결혼하라고 성화를 부린다면서 도와 달래.” “걱정하지 마. 일단 은서 부모님을 안심시킨 뒤에 반드시 이혼할 거야. 그때 너랑 혼인신고 하면 되잖아. 응?” 그 말을 마친 송재원은 고은서의 손을 잡고 나를 지나쳐 가려 했다. 이것으로 벌써 100번째였다. 나는 주먹을 꽉 쥐고 마지막 미련을 담아 말했다. “나, 이제 너를 백 번이나 기다렸어...” 송재원이 멈춰 서서 미간을 찌푸렸다. “그럼 은서가 가족한테 시달려 죽게 생겼는데, 그냥 두고 보라는 거야?” “그렇게 못되게 굴지 좀 마.” 차가운 말투에 손끝이 떨렸다.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고개를 들자 고은서의 득의양양한 눈빛이 보였다. 하지만 입에서는 가련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대표님, 실장님이 싫다는데 그냥 관두세요. 뭐, 집에서 묶어 놓고 몽둥이로 때리는 것뿐이잖아요. 저는 괜찮아요.” 송재원은 돌아보지도 않은 채 나를 밀쳐 냈다. “신경 쓰지 마.” 오늘 송재원은 유난히 말끔하고 멋있었다. 새 옷에 머리까지 새로 손질한 모습은 나와 혼인신고를 하기로 했던 어느 날과도 달랐다. 어쩌면 처음부터 나와 혼인신고를 할 생각이 없었던 건지도 모른다. 자기 이미지에 그토록 신경 쓰는 사람이 인생에 남을 순간을 허술하게 남길 리 없으니까. 두 사람이 번호표를 뽑아 대기실에 앉는 모습까지 본 나는 미련 없이 택시를 잡아 집으로 돌아왔다. 현관에 들어서자마자 백 번이나 다려 입었던 원피스를 벗어 가위로 갈기갈기 잘랐다. 그리고 불에 태워 흔적도 없이 없애 버렸다. 송재원과 함께한 7년도 저 원피스처럼 연기 속으로 사라질 때가 됐다. 제2화 집에 돌아온 뒤 정신없이 잠들었다가 눈을 뜨니 엄마에게 메시지가 와 있었다. [이번엔 성공했니? 언제 데리고 올 거야?] 창밖은 이미 어두워져 있었다. [이제 혼인신고 안 할 거예요.] [엄마, 저 집에 가고 싶어요.] 고향을 떠나 타지에서 몇 년이나 일하며 버틴 나였다. 하지만 모든 걸 내려놓고 돌아가 새 출발을 하고 싶다는 생각은 처음이었다. 엄마는 세계적으로 활동하는 디자이너였다. 작지만, 아는 사람은 다 아는 작업실을 운영했고, 나는 어릴 때부터 그런 엄마의 영향을 받으며 자랐다. 엄마는 자신의 인맥과 자원을 모두 내게 물려주려 했지만, 나는 외국에서 유학하던 시절 송재원을 만났다. 금융학을 공부하던 송재원은 누구보다 성실했다. 온 가족이 가진 것을 쏟아부어 그를 공부시킨 터라, 집안의 도움을 받는 다른 학생들만 보면 열등감과 불안에 시달리곤 했다. 그래서 나는 7년 동안 내 집안이 어떤 집안인지 한 번도 말하지 않았다. 그저 곁에서 함께하며 송재원이 조금씩 자신감을 얻기를 바랐다. 그사이 송재원은 자기 회사를 세웠고, 나는 기꺼이 그 회사의 직원이 됐다. 주변 사람들은 모두 우리 사이를 부러워했다. 일도 사랑도 순조로워지는 듯했다. 혼인신고만 마치면 그를 부모님께 소개하고, 엄마의 인맥도 연결해 줄 생각이었다. 이젠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 엄마는 곧바로 전화를 걸어 왔다. “그래, 집으로 오렴!” “엄마가 비행기표 끊어 놓을게. 도착하면 직접 마중 나갈 거야.” 통화를 마친 나는 불을 켰다. 환하게 드러난 침실은 텅 비어 있었다. 대충 배달 음식을 시키고 영상을 넘겨 보다가 하필 고은서가 오늘 올린 혼인신고 브이로그를 발견했다. 영상 속 두 사람은 내내 손을 맞잡고 있었다. 고은서를 바라보는 송재원의 얼굴에는 다정한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평소 웃음기 하나 없는 대표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재원 오빠를 좋아한 지 3년! 드디어 사랑의 결실을 보았어요!] 댓글에는 둘이 잘 어울린다며 야한 이야기는 언제 보여 줄 거냐는 짓궂은 질문까지 달렸다. 고은서는 수줍어하는 이모티콘과 함께 답글을 남겼다. [그런 일이 있어도 안 알려 줄 거예요.] 순간 식욕이 뚝 떨어졌다. 나는 배달 음식을 그대로 쓰레기통에 버렸다. 다음 날 아침, 나는 유능한 후배 디자이너에게 업무를 인계했다. 막 설명을 시작하려던 참에 송재원이 엘리베이터에서 걸어 나왔다. 입가에는 웃음이 걸려 있었고, 팔에는 자기 몸에 맞지도 않는 외투가 걸려 있었다. 진한 감귤 향이 코끝을 스쳤다. 모르는 척 지나가려는데 업무를 인계받던 디자이너 하윤아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실장님, 이건... 퇴사하시려는 거예요?” 나는 반사적으로 윤아의 입을 막으려 했지만 이미 송재원의 시선이 이쪽으로 향했다. “퇴사한다고?” 깊이 숨을 들이쉰 나는 그 자리에서 송재원에게 사직서를 보냈다. “응. 승인해 줘.” 송재원은 곧바로 메일을 열어 보고 거절했다. “안 돼.” “혼인신고서 한 장이 그렇게 중요해?” 나도 담담하게 대답했다. “나도 이제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해. 그저 지쳐서 좀 쉬고 싶을 뿐이야.” 송재원은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 “휴가는 며칠 뒤에 가. 어제 우리가 혼인신고 했다는 걸 회사 사람들이 다 알게 됐잖아. 네가 오늘 관두면 다들 은서를 욕할 거야.” 송재원은 잊은 모양이었다. 내가 가진 휴가는 그와 혼인신고를 하기로 했던 날마다 전부 써 버렸다는 사실을. 그의 머릿속에는 오직 고은서뿐이었다. 나는 송재원의 팔에 걸린 외투를 바라보았다. 입을 열기도 전에 송재원이 서둘러 변명했다. “어젯밤 너무 신나게 놀다가 외투를 잘못 챙겼어. 괜한 생각 하지 마.” 그러면서도 외투를 더 꼭 끌어안을 뿐, 오해받지 않도록 치워 놓을 생각은 없어 보였다. “아, 맞다. 어제 약속한 고급 차는 집에 세워 뒀어.” “네가 갖고 싶어 하던 팔찌도 차 안에 넣어 놨으니까 가서 뜯어 봐.” 언제나 이런 식이었다. 내게 잘못할 때마다 비싼 선물로 무마하려 했다. 거절하지 않자 송재원은 내가 화를 풀었다고 생각했는지 손바닥에 차 키를 쥐여 줬다. “됐지? 어린애 하나 때문에 우리까지 이렇게 싸울 필요는 없잖아.” “오늘 저녁엔 아버지 생신 잔치가 있어. 퇴근할 때 데리러 올게.” 그는 말을 마치고 내 뺨에 입을 맞추려 다가왔다. “대표님!” 익숙한 목소리가 그를 가로막았다. 송재원은 내 손을 놓고 서둘러 다가오는 고은서를 향해 걸어갔다. 고은서가 나를 보고 웃었다. “죄송해요. 대표님이 급하게 확인해야 할 서류가 있어서요. 일부러 방해하려던 건 아니에요...” 송재원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당연하다는 듯 서류를 받았다. 고은서는 입꼬리를 올리더니 일부러 송재원의 허리를 감쌌다. 그리고 직원들이 다 들으라는 듯 말했다. “참, 오늘 대표님 몸이 안 좋으니까 무슨 일 있으면 저한테 바로 말씀하세요!” 마치 누가 그의 주인인지 선언하는 것 같았다. 직원들이 자리에서 고개를 빼고 나를 안쓰럽다는 듯 바라봤다. 그 순간 손가락에서 반지가 스르르 빠졌다. 급히 주워 다시 끼워 보았지만 이상하게도 도무지 들어가지 않았다. 약혼할 때 송재원이 특별히 주문 제작한 반지였다. 세상에 단 하나뿐이며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만이 낄 수 있는 반지라면서 평생 행복하자고 했었다. 나는 반지를 고은서에게 내밀었다. 송재원이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나를 보았다. 나는 조용히 말했다. “제자리로 돌려줄게. 이제 이 반지는 내가 낄 게 아닌 것 같아.” 송재원은 고은서 대신 반지를 받아 손안에서 툭툭 튕기더니 쓰레기통에 던져 버렸다. “네가 싫다니 버리면 되겠네.” 그는 그대로 돌아섰고 고은서가 뒤따랐다. 사무실 문이 닫히기 직전 고은서는 나를 향해 손을 들어 보였다. 내 반지보다 훨씬 비싼 반지가 반짝였다. “누가 버린 쓰레기를 갖고 싶대요?” 제3화 옆에서 모든 걸 지켜본 하윤아는 화가 나 얼굴이 새빨개졌지만, 꾹 참고 물었다. “정말 떠나실 거예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오늘 송재원에게 결재받아야 할 기획서를 챙겨 그의 사무실로 들어갔다. 들어가자마자 송재원이 고은서를 품으로 끌어당기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나를 발견한 고은서는 당황한 목소리로 변명했지만, 송재원은 오히려 그녀를 더 세게 끌어안았다. “제가 발을 헛디뎌서 넘어진 것뿐이에요! 저희 아무 사이도 아니에요!” 송재원은 흐트러진 옷깃을 정리하고 있었다. 7년 동안 그는 사무실에서 나와 조금이라도 연인다운 스킨십을 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목에 선명히 남은 키스 자국을 보니 눈이 시렸다. ‘그렇게 급했나... 퇴근할 때까지도 못 기다릴 만큼?’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아.” 그리고 아직 옷매무새도 다듬지 못한 송재원 앞으로 서류를 내밀었다. 송재원은 민망했는지 얼굴을 붉히며 내게 화를 냈다. “심서연, 들어올 때 노크도 안 해?” “그리고 나 바쁜 거 안 보여? 꼭 이럴 때 서류를 들이밀어야겠어?” 나는 차분하게 대답했다. “오해하지 마. 검토받을 프로젝트 기획서를 가져온 것뿐이야.” 송재원은 한참 내 표정을 살폈다. “정말 그것뿐이어야 할 거야.” 그러고는 서류를 고은서에게 넘겼다. “그거 다음 분기 핵심 프로젝트야.” 내가 오랫동안 준비해 온 결과물이기도 했다. “은서가 검토하는 게 곧 내가 검토하는 거야.” 송재원은 나를 무심하게 흘겨봤다. 고은서는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기획서를 대충 몇 장 넘기더니 내 쪽으로 내던졌다. “이건 좀 아닌데요? 심 실장님 실력이 겨우 이 정도예요? 다시 해 오세요.” 나는 숨을 깊이 들이쉬고 바닥에 떨어진 서류를 주워 망설임 없이 사무실을 나왔다. 문밖에서 듣고 있던 하윤아가 분통을 터뜨렸다. “디자인 공부도 안 한 사람이 뭘 안다고 저래요!” 고은서가 나를 괴롭히려는 것뿐이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나는 기획서를 하윤아에게 건넸다. “내가 떠난 뒤에 조금 손봐서 다시 제출해.” “나머지는 이제 중요하지 않아.” 어차피 법적으로 부부가 된 건 저 두 사람이었다. 퇴근 전까지 모든 업무 인계를 마쳤다. 송재원이 퇴사를 승인해 주지 않겠다면 그냥 떠날 생각이었다. 그는 나를 데리러 왔을 때도 이미 텅 빈 내 자리에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함께 지하 주차장에 내려가자 고은서가 이미 조수석을 차지하고 있었다. 고은서는 송재원을 보자 일부러 나를 옆으로 밀쳐 내고 운전석으로 달려가 그를 맞았다. 비틀거리는 내 모습을 본 송재원이 눈썹을 찌푸렸다. “그런 유치한 누명 씌우기 좀 그만해.” 나는 어깨를 문지르며 아무 말 없이 뒷좌석에 앉았다. 생신 잔치가 열리는 호텔에 도착하자 송재원의 아버지가 직접 마중 나와 있었다. 그는 고은서를 보자 얼굴이 활짝 펴졌다. “아이고, 우리 며느리가 바로 이 아가씨구나!” 고은서는 웃으며 다가가 송태식을 가볍게 안고 인사했다. 나는 미리 준비한 선물을 건넸다. 예전에는 나에게 제법 친절했던 송태식이 선물을 받더니 경멸하는 얼굴로 말했다. “7년이나 내 아들 돈으로 먹고살았으면서 고작 이런 쓰레기를 선물이라고 가져와? 필요 없어!” 한쪽에 내팽개쳐진 귀한 산수화를 나는 말 없이 주워들었다. 그동안 알고 지낸 정을 생각해 생일 축하차 따라온 것뿐이었지만, 이럴 거라면 오지 말았어야 했다. 송재원의 얼굴이 싸늘해졌다. “우리 아버지가 그림 보는 눈이 없는 거 알면서 일부러 이런 걸 가져왔어? 성의도 없게?” 기가 막혔다. “지나친 생각이야.” 내 소장품 가운데 하나를 골라 왔을 뿐이었다. 하지만 저들 눈에 나는 그런 비싼 작품을 가질 리 없는 평범한 여자일 뿐이었다. 송재원은 얌전히 행동하라고 경고한 뒤 송태식과 고은서를 따라 들어갔다. 그 뒤를 따라 연회장에 들어서는 순간 누군가 내 어깨를 짓눌러 송태식 앞에 무릎 꿇렸다. “내 아들한테 그렇게 오래 얹혀살았으니 차 한 잔 정도는 무릎 꿇고 올려야 하지 않겠어?” 나는 몸을 비틀며 저항했다. “저는 재원 씨한테 얹혀산 적 없어요.” 같은 집에서 살았을 뿐, 생활비는 전부 내가 냈다. 송재원은 옆에서 한숨만 내쉬고 아무 설명도 하지 않았다. “아버지가 원래 널 탐탁지 않아 하셨잖아. 이럴 때 좀 잘 보이면 안 돼?” “틀린 말씀을 하신 것도 아니고.” 직원이 뜨거운 찻잔을 억지로 내 손에 쥐여 줬다. 손가락이 순식간에 새빨개졌다. 이후 비행기 시간을 놓치고 싶지 않았던 나는 뜨거움을 참고 모두가 보는 앞에서 찻잔을 내밀었다. “아버님, 차 드세요.” 그제야 송태식이 흡족한 듯 콧방귀를 뀌었다. 그러고는 차를 한 모금 마시더니 남은 차를 내 몸에 뿌렸다. “그래도 말은 들을 줄 아니, 이 차를 내가 내려 주는 복이라 생각해라.” 고은서는 곁에서 입을 가리고 킥킥 웃으며 우쭐한 눈빛을 보냈다. 나는 연회장 가장 구석진 자리로 안내됐다. 옷에는 찻물이 잔뜩 묻어 닦아도 지워지지 않았고, 손가락은 계속 떨렸다. 무대 위에서는 송재원이 고은서와 함께 송태식에게 차를 올리고 있었다. 저 둘은 무릎을 꿇을 필요도 없었다. 분위기는 그저 화기애애했다. 나는 잠시 눈을 감았다. 송재원은 아무렇지 않은 듯 틈을 내 메시지까지 보냈다. [난 그냥 은서랑 밥만 먹으려던 거야. 이렇게 될 줄은 몰랐어.] [오늘 잘 참아 줬으니까 약속할게. 은서 부모님 일도 빨리 해결해서 너랑 결혼할 방법을 찾아볼게. 어때?] 그가 내놓은 새로운 보상이었다. 하지만 나는 이미 아무 관심도 없었다. 무대 위에서 두 사람이 어른들의 성화에 못 이겨 서로 팔을 걸고 술을 마시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아무도 보지 않을 때 눈물을 닦고, 캐리어를 끌어 공항으로 향했다. 비행기에 오른 나는 송재원이 그동안 선물한 물건의 값을 모두 계산해 현금으로 돌려보냈다. 한 번도 사용하지 않은 선물까지 포함해서. 한참 뒤 송재원은 무심코 심서연이 앉았던 자리로 시선을 돌렸다. 자리가 비어 있는 것을 보고 마음이 급해졌다. “심서연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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